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대한해협 해전 (문단 편집) == 당시 한국 해군의 상황 == 한국 해군의 모체인 해방병단(海防兵團)은 해방 이후 난립하던 다른 사설 군사 조직들과는 달리 [[미군정]]의 승인을 받은 첫 군사 조직이었다. 그러나 당시 한국 해군에는 [[일본 제국 해군]]이 쓰다 진해에 버린 목선 몇 척만 있었고[* [[일제강점기]]까지는 [[대한제국]] 시절 일본에 발주해 만든 [[광제호]]가 한반도에 있긴 했으나 해방 이후 일본인들을 일본 본토로 수송하는 용도로 쓰이면서 일본으로 넘어가 버렸다.] 그나마 상당수는 만들다 방치한 것을 해방병단원들이 어떻게든 자재를 구해 완성해 굴리는 열악한 환경에 처했다. [[조선해안경비대]]가 된 이후 [[미국 해군]]이 쓰던 상륙정이나 [[소해정]] 등을 여러 척 넘겨받았으나, 함정 간 혹은 함정에서 육상을 타격하는 게 불가능한 이들 소형 지원함정들만으론 한계가 있었다. 주무장이 강해봐야 [[M2 브라우닝 중기관총]]이었고, 후에 37mm [[대전차포]]를 장비하는 개수를 했으나, 이마저도 포가 부족해 출동 나가는 배가 입항한 배의 포를 인계받아 교대로 장착하고 나가야 했다. 결국 함포가 있는 전투함을 구입하기로 결심한 [[손원일]] [[제독]]은 '함정건조기금 거출위원회'를 결성해 [[장교]]들과 [[하사관]], [[수병]]들이 봉급의 일부분을 기금으로 냈고, 나중에는 국민들까지 모금에 동참하였다. 이때 모인 1만 5000달러에 [[이승만]] 대통령이 정부지원금 4만 5000달러를 더 얹어 줌으로써 손원일 제독은 6만 달러를 들고 [[미국]]으로 가 [[미국상선단사관학교]] 실습선으로 무장이 제거된 채 쓰이다 민간에 매각되었던 화이트헤드 함을 포함한 총 4척의 초계정(Patrol Craft, PC)[* 전투함이긴 했으나, 미국 해군에선 대잠 초계정으로 대량으로 뽑아낸 소형 함정이었으며(보통 [[대위]]가 [[정장#s-2]]으로 부임했다), 화력도 3인치 포와 기관포 정도로 빈약했다. 본래 손원일 제독은 이보다 큰 2천톤급 호위함정인 Patrol Frigate(PF)을 사오려 했으나, 이들은 [[미국 의회]]가 한국에 금수조치한 군수품들이어서 사지 못하고, 대신 궁여지책으로 민간에 불하되어 법적으로 군용 선박이 아닌 PC들을 골라야 했다.][* 미군이 왜 공산 북한을 코앞에 둔 우방국 한국에 무기 금수 조치를 취했냐면, 북한의 전쟁 의지를 크게 보지 않고 괜한 분쟁을 피하려 했기 때문이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과 한국군은 미국이 무기만 주면 38선을 넘어 쳐들어갈 기세로 큰소리를 치고 있었고 이는 미국이 한국에 주력무기 급의 병기를 넘기지 않는 이유가 되었다. 한국전쟁 당시 남북한의 장비 수준을 보면 의아해 하겠지만, 전차와 전투기 같은 장비들이 인도되는 49년 말 이전 국지전 중에는 남측이 먼저 시비를 건 사례들도 있었다.]을 사오게 된다.[* 더 자세한 내용은 [[http://cheonji.egloos.com/4992547|여기로]]][* 이 때 당시 백두산함을 인수하러 간 승조원들은 발전된 미국의 모습을 보면서 엄청난 [[문화충격]]을 경험했다고 한다. 특히 그들을 놀라게 한 것은 술집에서 본 [[텔레비전|영화를 보여주는 기계]]였다고.[[https://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125672|출처]]] 이 4척 중 화이트헤드가 바로 [[백두산함]]이다.[* [[백두산]](白頭山)의 백두를 영어로 직역하면 White Head가 된다. 우연의 일치치곤 기막힌 이야기다. 화이트헤드는 해양대 졸업생으로 [[제2차 세계 대전]] 중 해군 장교로 임관했다 전사한 화이트헤드 [[소위]]의 이름을 딴 것이다.] 백두산함은 하와이에서 3인치 포를 장착하고[* 이때 [[태극기]]를 달고 입항하였는데 [[하와이]]의 교민들이 처음엔 미국 해군 태평양 함대의 거대한 [[전함]]과 [[순양함]], [[구축함]]들 사이로 나타난 조그마한 쪽배를 보고 절망했으나, 곧 다들 마음을 고쳐먹고 태극기를 보고 만세를 불렀다고 한다. 이 때 하와이 교민 사회의 어두운 면이 부각되었는데, 이승만이 하와이에 체류하면서 친이파와 반이파로 파벌 싸움을 조장해 친이파가 우세한 상황에서, 반이파 교민들은 친이파들의 견제로 군항 근처에도 못 가보고 산 위에서 멀리 보이는 조그만 백두산함을 지켜보는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괌]]에서 3인치 포탄 100여 발을 구입한 뒤 1950년 4월 10일 [[진해]]항에 입항하였다. 함정을 마련했음에도 불구하고 포탄이 백여 발에 불과하여 나무로 모형 포탄을 만들어서 장전 훈련만 하는 등 당시 해군의 상황은 정말로 열악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